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니발 바르카 (문단 편집) ==== [[칸나이 전투]] ==== 한니발이 칸나이 평야를 점령하자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의 [[회전#s-2]]이 임박했다. 한니발이 칸나이를 차지한 다음해,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새로운 집정관들이 되었다. 당시 바로는 결전론자였고, 파울루스는 지구전론자였다. [[원로원]]은 8개 로마 [[군단병]]과 8개 [[라틴]] 군단병, 6천 4백 기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9만 대군을 두 집정관에 맡겼다. 두 집정관은 즉시 칸나이로 진격했다. 그러나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군을 압도적으로 격파하였다. 이는 '''한니발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영예'''이자 '''[[로마]]의 역사적인 대패'''였다. 한니발은 이 승리로 단숨에 [[지중해]]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떨쳤다. 반면, '''로마의 상황은 처참했다.''' [[로마군]]은 9만 명 중 5만 에 이르는 병사가 [[전사]]했고, 3만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렇게 증발한 병력은 당시 로마의 가용 병력 1/5에 달했다. 무사히 도망간 [[로마군]]은 1만 명도 되지 못 했다. 두 집정관 중 바로는 도주했고 파울루스는 전사했다. 로마가 어마어마한 패전을 하자 로마의 동맹들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칸나이 남쪽의 로마 동맹시들이 가장 빠른 속도로 이탈했다. 심지어는 [[캄파니아]] 지역 도시들 몇몇까지 이탈했다. 이 도시들은 로마가 위치한 라티움 지역의 바로 턱밑 지역이자 [[삼니움 전쟁]] 때도 함께 해온 오랜 동맹시들이었다. 특히, [[카푸아]]가 한니발 편으로 돌아선 것은 뼈 아팠다. 카푸아는 캄파니아 지방의 맹주이자 이탈리아에서 로마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번영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때 전임 집정관이었던 파비우스가 모범을 보여 명예를 회복했다. 그는 로마 시민들과 원로회를 격려하기 위해 성문에 파수꾼을 세워 사람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았다. 의외로 이 일을 계기로 파비우스에 대한 악평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렇게 빨리 로마의 동맹에 균열이 난 이유는 로마가 원래 동맹시들로부터 그다지 환영받지 못 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동맹시들은 로마의 강한 국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로마에 복종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도시의 지배층들은 로마와의 화친을 추구했지만 시민들은 로마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사료에 따르면, 이탈리아 도시들에서는 대개 시민들이 한니발을 지지하고 지배층은 로마와의 동맹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는 로마가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매번 동맹시의 시민들을 보조군으로 대규모 징발해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리품조차도 로마 시민과 동맹시의 지배층에게만 배분되었고, 동맹시의 시민들에게 보상은 없었다. 그래서 동맹시의 시민들은 로마를 증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